근대 계약법의 기초가 되는 라틴어 경구가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Facta sunt servanda)는 말이다. 약속이란 모든 인간관계의 기본으로 신뢰와 예측이라는 사회생활의 기본을 결속하는 매개체다. 따라서 약속과 그것을 지키는 행위야말로 '인간다움'을 특성화하며 문명성을 상징하게 되며 특히 공적 분야의 약속은 때로는 법률의 형태로, 또 때로는 정책의 형태로 사회구성원 모두를 구속하는 힘을 지니게 된다.

 

법률적 강제적 구속력은 없으나 그에 버금가게 도덕적 책임성을 지니는 약속이 정치인들이 선거때 내거는 公約이다. 법률적 구속력이 없어서 무책임하게 남발되기도 하기에 빌空자 空約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유권자들의 신임과 지지를 결정짓는 약속이기에 절대로 空約이 되어서는 안되는 약속이 公約이다. 그래서 만약 공약이 지켜지지 못할 경우에는 신임과 지지를 보냈던 국민들에게 충분한 설명과 이해를 구해야만 한다. 경우에 따라선 그 설명과 이해를 구하기 위해 재신임의 절차를 거쳐야 할 수도 있을 만큼 현대 민주주의 과정에서 '공약의 이행'(Manifesto)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 정치권은 언제부턴가 선거에서의 공약을 가볍게 여기는 풍토를 보여 왔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당선만 되면 된다"는 목적지상주의에 빠져 선거직전 유권자에 구미에 맞는 그럴듯한 약속을 남발하고 당선 후에는 이런 저런 이유로 그 약속을 외면하는 못된 정치인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렇게 우리 국민들이 한두번 속다 보니 기존 정치인들에 대한 불신과 비판의식은 높아져 온 것이다. 최근에 일고 있는 이른바 '새정치 열풍'의 존재이유이다.

올해 6월 전국 지방선거를 앞두고 국회에 이른바 '정치개혁특위'가 구성되어 활동중에 있다. 여당은 대통령선거공약으로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 정당공천 배제를 약속했고, 야당은 작년여름 전당원 투표로 기초단체장과 기초의원 정당공천 배제를 당론으로 정했다. 그럼에도 정치개혁특위에서 논의되는 내용은 공약이나 당론과는 다르게 진행되는 모양이다. 정당공천을 배제하면 수도권 인근의 기초단체장을 민주당 출신 현역이 독점하리라는 생각으로 여당은 기초단체장 정당공천은 유지하길 희망하고, 야당은 그 반대 생각으로 여당이 내건 광역시 기초의회 폐지안에 반대하며 기초단체장 정당공천 폐지를 주장한다.

모두 속이 빤히 보이는 주장들이다. 눈앞의 이해관계에 얽매여 약속은 지켜져야 한다는 대의명분을 버리는 행위이다. 필자는 지난 총선과 대선기간중 지역구를 돌며 목이 터져라 외쳤다. 정치개혁을 통해 불신받는 정치풍토를 고칠 것이며 그중 기초선거의 정당공천 폐지를 약속하겠다고 외쳤다. 비록 국회의원이 되지는 못했지만 여야 정치권이 그 약속을 헌신짝처럼 집어 던지려 할 때 극심한 자괴감을 느낀다.

우리 국민들이 기초단체 선거에서 정당공천을 배제하기 원하는 것은 풀뿌리 민주주의의 정상화나 지방선거 공천비리의 척결이라는 근본적 욕구에서도 비롯되지만, 정치심리학적으로는 기존 정치권이 지닌 기득권(공천권)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우리 정치인들이 지닌 이런 저런 권한들이 그들이 응당 가져야 할 범위를 훨씬 넘어선 특권으로 보고 있기에 '특권포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여야 정치권은 이런 저런 이유와 구실을 대며 '특권포기'를 거부하고 있다.

약속은 지켜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헛된 空約을 남발하는 정치인들을 퇴출시키는 일, 그것은 유권자의 몫이다. 2014년은 말의 해다. 말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은 '말바꾸는 사람'이라 한다. 누가 말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인지 눈 크게 뜨고 지켜봐야 할 시점이다.